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Posted by 쪽빛아람
2015. 9. 24. 23:30 2015/Life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등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1965.11.4>


- 시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 <문학춘추> 1965년







 오늘까지 김수영 시인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인을 알아 갈수록 시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나랑 정말 똑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위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작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제 모습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벽이라도 보고 소리라도 치라고 했지만, 벽을 보고 소리치기는 커녕 단지 내가 조금 힘든 일을 참지 못하고 눈앞의 사람들에게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람인 지금의 저를 그린거라고해도 믿어질 정도입니다. 부끄러운데 막상 뭔가 할 수 있는것도 없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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